식물은 고통을
느낄 수 있을까?
남효창
숲연구소 이사장

나무는 고통과 안락함 또는 편안함을 일원론(monism)으로 풀어간다
식물과 동물은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선조를 갖고, 같은 물질을 활용하며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는 방식이 달랐다. 식물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를 스스로 충당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택했다. 반면 동물은 근육질의 단백질을 만들 어야 했고, 바쁘게 쫓고 쫓겨야 하는 삶의 방식에서 근육세포와 신경세포의 발달이 필수적이었다. 그렇다고 식물이 반응하지 못한다거나 자기표현을 하지 않는 생존자란 말은 아니다.
나무란 식물이 변덕스러운 환경과 예상치 못한 다른 생물들의 침범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때로는 자연환경이 나무에게 감내의 한계 수준 이상을 요구할 때도 있다. 극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나무의 노력 과정은 가히 인간이 표현하는 고통과 아픔 내지는 고뇌적 삶이 식물 수준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함께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무는 고통과 안락함 또는 편안함을 일원론 (monism)으로 삶을 풀어간다. 이는 곧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중첩 (superposition) 현상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숲은 이미 오래전에 나무들의 고통에 대한 몸부림으로 나타난 형상이다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도 자신에게 딱 맞는 각각의 생활환경이 있다. 적절한 온도, 적당한 빛과 물 그리고 적합한 양의 대기 이산화탄 소다. 하지만 환경은 그들에게 자비로운 신이 아니다. 이 불균형은 그들을 고통 스럽게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이야말로 나무를 더 건강하게 하고 앞으로 더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생물 진화의 추동력이 바로 이 고통이다. 그러한 나무들의 몸부림을 우리는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아니 주변에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을 볼 수 있는데, 그 숲은 이미 오래전에 나무들의 고통에 대한 몸부림으로 나타난 형상이다. 그곳엔 평온한 상황만을 고집했던 나무들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바람과 물과 빛은 그들을 가차 없이 도태시켰다.
나무는 기꺼이 자신의 몸을 변형시켜 위기를 극복한다
공간 이동을 못하는 나무는 종잡을 수 없는 환경의 변덕을 고스란히 안고 견디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빛의 세기나 질 좋은 빛을 찾아 이동하거나, 풍요로운 땅을 찾아 서식지를 탐색할 수도 없는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을 바꿔내는 일이었다. 아무리 미약한 작은 애벌레라고 하더라도 그가 잎을 요구하는 만큼 나무는 자신의 몸을 내주어야 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한자리에 가만히 서서 따가운 햇살, 자외선까지도 고스란히 모든 것을 받아들여 야만 하는 것이 나무의 삶이다. 불편한 것을 피할 수 없고, 성가신 자연환경을 변화시킬 수도 없는 생명체인 나무. 그들은 기꺼이 자신의 몸을 변형시켜 위기를 극복한다. 순식간에 잎을 파괴하는 무서운 자외선이나 해로운 강한 빛을 피하는 방식은 잎의 세포들을 두껍게 만들고, 잎의 표면에는 자외선 차단제인 지방 성분, 왁스를 생산해서 차단을 한다. 반면 빛이 약한 곳에서는 잎세포를 얇고 넓게 제작해서 가능한 한 많은 빛을 흡수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땅속에 물이 넘치면 뿌리 썩음을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산소를 공급하려는 노력이나 물이 세포 속으로 넘치게 흘러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차단하는 장치도 마련 한다. 이뿐 아니라 애벌레들이 잎을 갉아먹으면 테르펜, 페놀이란 물질을 가공 해서 더 이상 먹지 못하게 자신을 방어할 화학물질도 만들어낸다. 때로는 알칼 로이드를 생산해 자신의 꽃을 찾는 곤충에게 친절한 향기를 내보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무가 환경에 대해 이러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나무의 입장에서는 안락하고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행위를 위해 많은 생산비용을 치러야 하는 것도 나무에겐 추가적 부담이다.
나무는 자가 치유의 대가들이다
동물에게 고통이나 통증이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세포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익숙하고 일상적이지 않은 상태가 되면, 생물체들은 가장 낮은 단위인 세포가 긴장하거나 압박을 받는다. 압박과 긴장이 지속되고 강도가 높아지면 통증이나 고통으로 이어진다. 나무는 이것들을 회피하기 위해 세포에서 저항성 물질을 생산해낸다. 나무는 이 놀라운 물질을 스스로 제조하고 처방하는 자가 치유의 대가들이다. 동물인 사람처럼 병원이나 약국이 필요 없단 뜻이다. 스스로 병원이고 스스로 약국을 운영할 뿐 아니라 24시간 가동되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즉 고통이나 고뇌라는 단어의 사용은 오롯이 인간이란 생명체에게만 국한되는 전유물이 아니지 않을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생물, 그것이 단세포 생물이든, 어떠한 형태를 띠고 살아가든 세포로 만들어진 생명체는 모두가 갖고 살아야만 하는 피할 수 없는 것, 스트레스다. 왜냐하면 세포이기 때문이다.
자가 영양 생물이었던 식충식물이 식충식으로 변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우리는 동물을 잡아먹고 살아가는 식물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식충식물은 한때 식물이 살아가는 방식 그대로 자가 영양 생물이었다. 빛과 분자만 있으면, 거대한 탄수화물과 단백질과 지방뿐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효소나 호르 몬과 비타민을 스스로 조제해내는 생물인 식물이다. 그런데 식충식물은 도대체왜 그토록 자비로운 삶을 포기하고 타자의 몸을 탐해야만 했을까? 무엇이 그들을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어야만 하는 시스템을 고집하게 했을까? 식충식으로 변환할 수밖에 없었던 심오한 이유는 무엇일까?
알고 보면 그 이유는 단순하다. 식충식물은 그동안 평범한 식물 세포에 없었던 놀라운 장치를 마련해야만 했다. 이 기술은 대체로 동물이 사용하고 있는 전유물이기도 하다. 식물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기능을 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다는 것은 세포 단위의 큰 혁신과 대혁명이 없고서야 잘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이러한 변화는 시련과 고뇌와 고통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다. 식충식물의 공통점은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서식지가 빈곤하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특히 아미노산과 단백질을 생산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재료가 질소인데, 질소가 부족한 척박한 곳에 살게 된 것이 이들이 식충을할 수밖에 없게 몰아세웠다.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과 환희를 나무는 동일한 것으로 취급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온대 지역의 나무는 찬란한 봄과 여름이란 환경을 맞이 하기 위해 가을과 겨울이라는 장장 6개월의 시간을 인내하며 온갖 시련을 이겨 야만 한다. 죽은 듯이 서서 휴면을 취하지만, 활동이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다.
나무의 몸을 이루는 세포 각각은 꼼지락거리며 삶에 대한 욕망을 아낌없이 봄으로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모든 생물은 세포로 움직인다. 세포를 구성하는 물질이나 세포가 꿈을 꾸는 이상적인 세상은 과정이 다를 뿐 욕망은 다 같은 한 방향이다. 단지 세상을 대하는 태도, 즉 방식이 다르다. 동물은 감정 표현을 할 수 있는 오감이 뚜렷하게 발달한 반면, 식물은 표현보다는 실행에 방점을 찍고 있다.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과 환희를 나무는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는 듯하다. 몸과 의식을 분리해서 보는 이원론 (dualism)적 삶보다는 둘을 하나로 보는 일원론 (monism)적 삶에 충실한 150년 전부터 살아온 집 앞 버드나무를 보며 생각하게 되었다.
남효창|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산림생태학으로 석사 학위를, 산림환경정책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학교 산림환경정책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숲을 연구하다가 귀국, 2000년까지 서울대학교 임업 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으로 재직했다. 현재 숲연구소 이사장, 마인바움 대표이사로 있다. 저서로 『나는 매일 숲으로 출근한다』, 『나무와 숲』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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