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관점에서 본 식물의 생명성|식물도 감정이 있지 않을까?

불교적 관점에서 본
식물의 생명성

민태영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강사, 한국불교식물연구원 원장


식물이 무정이었던 이유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의 개념은 생명체의 존재 여부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불교에서 유정은 인간, 동물, 아귀, 지옥 존재 등 감정과 의식이 있는 존재이며 무정은 식물, 돌, 물 등 의식이 없고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존재를 의미한다.

식물은 계율 속에서 생초목을 해치면 죄가 되었으며 함부로 밟거나 깔고 앉지도 남용하지도 말라고 하면서 생명체로서 인식되기도 했지만 생명의 태어난 방법을 나누는 방식 속에도 윤회의 장에도 속하지 않는 모호하고 이중적인 존재였다.

그 이유는, 생존을 위해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사용하고 집도 짓고 열매나 풀은 먹으며 농사를 지어 생계를 잇는 행위가 율(불살생의 계)을 어기는 것이니 그 악업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해탈은 고(苦)의 제거와 소멸의 과정이지만 식물은 고의 현상이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윤회는 고통의 원인과 그 해결 방법을 이해하는 중요한 논리이다. 이 윤회와 업설이 정립되면서 그 주체가 되는 ‘식(識)을 지닌 유정 중생’에서 식물은 제외되었으나 이후 ‘세계’에 대한 불교의 인식이 바뀌면서 인간 이외의 존재인 식물의 생명성에 대한 인식 또한 변화되어갔다.

식물의 생명성과 능력
식물의 생명성, 영혼의 존재 여부에 관한 논란은 서구에서도 수 세기 전부터 이어져왔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저서 『영혼론』에서 생명을 가진 것이 살아 있는 까닭은 영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영혼의 보유 여부를 결정짓는 요소를 운동과 감각의 두 가지로 정의했다. 이 관점에서 식물은 무생물이었으나 번식이 가능한 식물을 무생물로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그는 영혼의 종류를 섭생, 성장, 생산의 단순 가능태를 갖는 식물 영혼, 여기에 외적 감각과 내적 감각을 갖는 동물 영혼 그리고 이 둘에 합리적 판단 능력과 덕을 수행할 도덕적 의지를 지닌 사람의 영혼 등 세 가지로 구분했다.

영혼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는 수 세기 동안 서구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철학자들은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은 생물로 인정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반면 고대 원자론을 완성한 데모크리토스(BC 384~360)는 모든 사물은 원자로 구성되어 끊임없이 움직이는데 움직이지 않는 식물 또한 예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식물은 뇌와 영혼을 보유하고 있으며 설사 하등식물이라도 외부 스트레스를 느끼고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플라톤, 린네와 페히너, 다윈 등 역사상 최고의 지성들이 식물의 지능을 옹호하기도 했다. 찰스 다윈은 그의 논문 「식물의 운동력」(1880)에서 식물의 뿌리에는 하등동물의 운동을 제어하는 뇌와 유사한 것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식물의 근단(root tip)을 의미하는 것으로 실제 나무는 땅속 뿌리의 박테리아와 균류를 통해 정보를 전달하고 잎과 줄기에서 내뿜는 화학적 물질을 통해 다른 개체와 소통하며 관계를 형성한다.

오늘날 환경 저널리스트 마이클 폴란과 세계적 식물학자 스테파노 만쿠소는 각각 『욕망의 식물학』(2006)과 『매혹하는 식물의 뇌』(2017)를 통해 식물이 지능을 가지고 있으며 오감을 가지고 상호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스테파노 만쿠소는 ‘식물지능학(Plant Intelligence)’이라는 분야를 개척해 자연과 식물에 대한 ‘식물의 감각과 지성’에 대해 연구하고 입증해나가고 있다. 식물의 능력은 어디까지일까?

식물 중생을 위한 변명
생물학에서는 생체 분자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해 분자생물학, 세포생물학 등을 다룬다. 그리고 유전과 진화, 분류를 거쳐 동물 생리, 식물 생리를 다루고 생태로 마무리되는 것이 기본 과정이다.

이 가운데 동물생리학은 호르몬, 소화, 감각, 신경, 운동 등으로 과정이 좀 더 분화되어 있다. 동물에 비해 식물에 대해 알아야 할 내용이 적어서라기보다는 ‘관점’,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편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식물은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존재로 거의 움직일 수 없다. 이동이 자유로운 다른 생명체와는 다른 생존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식물은 잎이 뜯어 먹혀도 다시 잎이 자라고 식물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데 식물은 구조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처럼 각 감각기관이 모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듈식의 구조(조립품, 구성품과 같은 구조)를 이루고 있어 각 부분이 상호작용을 하거나 각자 자율적으로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 자체가 아예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식물에 심장이 없다고 해서 순환계가 없다고 할 수 없으며 폐가 없으니 호흡기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생각을 주관하는 뇌가 없다는 이유로 지적 능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식물이 지능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지능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이다. 식물은 동물이나 인간과는 그 ‘방식’은 같지만 ‘구조’ 자체가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 동물과 식물과의 구조적 차이를 이해했다면 오래전 일관되게 식물 중생설을 주장한 자이나교가 이를 부정한 불교 측의 반론에 대해 이런 생물학적 지식을 근거로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식물의 불교적 생명성
식물은 감정이나 의식이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불교적 관점에서 식물은 유정이 아닌 무정의 존재로 간주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었든 혹은 누구이든, 생명의 영역에서는 모든 생명이 본원적으로 평등하고 상호 의존적이라는 점을 설하는 불교의 가치가 존재하는 한 식물은 유정 중생이다.

생명체의 목적은 성장, 발전, 생존, 번식으로서 모든 생명은 이처럼 같은 방향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며 그 생명의 질서 속에 인간만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모든 존재는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연기의 그물 속에서 서로 의지하고 서로 관계 맺으며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모든 존재는 다양한 인연이 모여서 존재하게 되는 것일 뿐 실체가 없으니 무상하며 무아라고도 한다.

승가의 삶은 물론 기본적으로 소욕지족의 삶을 강조했던 불교이고 보면 그 속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자세가 오롯이 담겨 있다.

불교가 모든 존재에 대해 무한히 포용하는 인식은 그들에게 부여된 가치에서도 엿볼 수 있다. 불교는 ‘불성’이라는 단어 속에 각 개체의 내재적 가치를 담고 있는데 불교학의 발전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발전해온 불성론은 중생이 성불하면 초목도 성불한다는 비정의 성불론에까지 이른다. 모든 존재 사이의 차별은 내 마음의 가치 기준에 의해 있을 뿐이며 사물 그 자체에는 차별이 없다는 논리이다.

이처럼 불교가 식물을 유정 밖의 생명체에서 다르지 않은 존재로 바꿔나가기까지 기본적으로 불교의 논지 속에는 이미 불살생, 연기론, 불성론 등 나 이외의 생명들과의 공존을 논할 만한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식물은 중생의 범주에 속하지 못했으나 식물의 불교적 생명성은 이러한 논의들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현대는 철학이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행동 양식으로서 종교의 역할이 강조되는 시대이다. 불교의 근본적인 논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다면 불교의 이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가려는 시도는 언제든 필요하다.


민태영|중앙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건국대 대학원 분자생명공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동국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불교대학 강사, 한국불교식물연구원 원장(www.kbpi.org)으로 있으면서 불전에 수록된 식물의 기초 자료화 및 자원화와 문화 콘텐츠화 등 불교 식물의 활용성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경전 속 불교 식물』과 『마음을 밝히는 붓다의 식물 108가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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