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녀(裸女)의 유혹’ 극복한
색심(色心) 없는 마음
소요산 자재암
백원기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자재암 대웅전 |
자재암 나한굴과 청량폭포 |
색심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자재무애에 이를 수 있다는
깨달음의 미학 일러준 자재암
소요산 자재암은 경기도의 소금강이라고 할 만큼 산세가 수려하고 단풍으로 유명하다. 원효대사가 요석 공주와 인연을 맺은 후 찾아와 수행하다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자재무애(自在無碍)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 자재암이라 했다. 소요산이란 이름은 서경덕, 매월당 김시습이 자주 소요했다고 해 붙인 이름이라 한다. 관세음보살이 여인으로 변신해 원효대사를 유혹했다는 ‘나녀(裸女)의 유혹’ 설화는 색심(色心)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자재무애에 이를 수 있다는 깨달음의 미학을 일러준다.
비에 젖은 나녀로 나타나 원효 스님 시험한 관세음보살
비가 몹시 내리는 어느 날 밤이었다. 심야에 약초를 캐다가 길을 잃은 아녀자로 화현한 관세음보살이 원효 스님에게 하룻밤 쉬어 가기를 원했고, 중생구제의 구실을 붙여 수도일념의 심지를 시험하고자 했다. ‘이토록 깊은 밤, 폭풍우 속에 여인이 찾아올 리가 없는데…’ 거센 비바람 속에서 얼핏 여인의 음성을 들었던 원효 스님은 자신의 공부를 탓하며 다시 마음을 굳게 다졌다. ‘아직도 여인에 대한 동경이 나를 유혹하는구나.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결코 자리를 뜨지 않으리라.’
그때였다. ‘바지직’하고 등잔불이 기름을 튕기며 탔다. 순간 원효 스님은 눈을 번쩍 떴다. 비바람이 토굴 안으로 왈칵 밀려들었고, 또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스님은 귀를 기울였다. “스님, 원효 스님, 문 좀 열어주세요.” 스님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망설였다. 여인은 황급하게 문을 두드리며 스님을 불렀다. 스님은 문을 열었다. 왈칵 비바람이 방 안으로 몰려들면서 방 안의 등잔불이 꺼졌다.
“스님, 하룻밤만 지내고 가게 해주세요.” 여인의 간곡한 애원에 스님은 문 한쪽으로 비켜섰다. 여인이 토굴로 들어섰다. “스님, 불 좀 켜주세요. 너무 컴컴해요.” 스님은 묵묵히 화롯불을 찾아 등잔에 불을 옮겼다.
방 안이 밝아지자 비에 젖은 여인의 육체가 눈에 들어왔다. 와들와들 떨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스님, 추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제 몸 좀 비벼주세요.” 여인의 아름다움에 잠시 취해 있던 스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공연히 들여놨나 싶어 후회했다. 떨며 신음하는 여인을 안 보려고 스님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비에 젖어 속살이 들여다보이는 여인의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일어나고 마음에 따라 멸하는 것, 내 마음에 색심이 없다면 이 여인이 목석과 다르지 않으리라.’
이미 해골 물을 달게 마시고 ‘일체유심조’의 도리를 깨달은 스님은 다시 마음을 정리했다. 이 여인을 목석으로 볼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여인’으로 보면서도 마음속에 색심이 일지 않으면 자신의 공부는 온전하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다시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여인의 몸을 비비면서 염불을 했다. 여인의 풍만한 육체는 여인의 육체가 아니라 한 생명일 뿐이었다. 스님은 여인의 혈맥을 찾아 한 생명에게 힘을 부어주고 있었다.
여인과 자기의 분별을 떠나 한 생명을 위해 움직이는 원효 스님은 마치 자기 마음을 찾듯 준엄했다. 여인의 몸이 서서히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여인은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스님 앞에 일어나 앉았다. 여인과 자신의 경계를 느낀 스님은 순간 밖으로 뛰쳐나왔다.
폭풍우가 지난 후의 아침 해는 더욱 찬란하고 장엄했다. 간밤의 폭우로 물이 많아진 옥류폭포(玉流瀑布)의 물기둥이 폭음을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스님은 훨훨 옷을 벗고 옥류천 맑은 물에 몸을 담갔다. 뼛속까지 시원한 물속에서 무한한 희열을 느끼는데 여인이 다가왔다. “스님, 저도 목욕 좀 해야겠어요.” 여인은 옷을 벗어 던지고는 물속으로 들어와 스님 곁으로 다가왔다. 아침 햇살을 받은 여인의 몸매는 눈이 부셨다. 스님은 생명체 이상으로 보이는 그 느낌을 자제하고 항거했다. 결국 스님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너는 나를 유혹해서 어쩌자는 거냐?”
“호호호, 스님도. 어디 제가 스님을 유혹합니까? 스님이 저를 색안(色眼)으로 보시면서!” 큰 방망이로 얻어맞은 듯한 순간 스님의 머릿속은 무한한 혼돈이 일었다. ‘색안으로 보는 원효의 마음’을 거듭거듭 뇌이면서 원효 스님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폭포 소리가 들렸고 캄캄했던 눈앞의 사물이 제 빛을 찾고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의식되는 눈앞의 경계를 놓치지 않고 스님은 갑자기 눈을 떴다. 스님은 처음으로 빛을 발견한 듯 모든 것을 명료하게 보았다.
“나 원효에게는 자재무애의 참된 수행의 힘이 있노라!”
‘옳거니, 바로 그거로구나. 모든 것이 그것으로 인해 생기는 그 마음까지도 버려야 하는 그 도리!’ 스님은 물을 차고 일어섰다. 그의 발가벗은 몸을 여인 앞에 아랑곳없이 드러내며 유유히 걸어 나왔다. 주변의 산과 물, 여인과 나무 등 일체의 모습이 생동하고 있었다.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갖가지 법이 없어지는 법, 나 원효에게는 자재무애의 참된 수행의 힘이 있노라!” 하는 법문에 그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금빛 찬란한 후광을 띤 보살이 되어 폭포를 거슬러 올라 사라졌다. 원효 스님은 그곳에 암자를 세웠다. 자기의 몸과 마음을 뜻대로 한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자재암(自在庵)’이라 했다.
백원기|동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방문화대학원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평생교육원장을 맡고 있다. 『불교설화와 마음치유』, 『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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