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는 시간 | 시간의 흐름은 느리게 빠르게 조절할 수 있을까?

양자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는 시간

김성구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시간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철학이 탄생한 이후 2,500년 이상 이어져온 질문이지만 그 본질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는 아무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리학으로 한정해 시간에 대해 살펴보아도 상대성 이론, 엔트로피, 양자론, 우주론을 다 고려해도 모든 물리학자들이 동의하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지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조차 물리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어느 한 저명한 물리학자가 쓴 책이라고 해서 그 책의 내용을 다른 물리학자들도 동의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에 대해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두 가지 극단적인 관점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뉴턴의 절대 시공간의 개념으로 사물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이 있고, 이 시공간을 무대로 다른 사물들이 이 무대 위에서 온갖 물리적 사건들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라이프니츠의 관점으로 시간과 공간은 사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는 관점이다. 관계론적 관점은 시간이란 사물의 변화의 척도로서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며 사물에 변화가 없으면 시간도 없다는 것이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사물 사이의 관계가 공간을 정의한다는 것으로 모든 사물이 공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그물망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관계론적 관점에 의하면 시공간이란 결국 사물 간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지 실재성은 없다.

이 글의 목적은 양자물리학의 관점에서 시간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 본질과 현상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지만 시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라면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말하는 시공간의 의미를 말하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일반 상대성 이론이 말하는 시공간의 내용은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관점 모두를 수용하는 중도적 입장에 있다. 즉 사물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시공간의 개념은 틀렸고, 시간과 공간은 사물의 변화나 관계를 통해서 의미를 갖는 양이지만 사물이 실재하는 것처럼 시공간도 실재한다. 중력장이 바로 시공간으로서 시공간도 고무판처럼 구부러지기도 하고 펴지기도 하고, 다른 것들과 밀고 당기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 상대성 이론만으로는 시간의 본질을 말할 수 없다.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론을 결합한 양자 중력(quantum gravity)을 연구해야 한다. 시간의 탄생과 본질에 관해 양자 중력에서 말하는 내용은 흥미로운 데가 있지만, 그 내용은 실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이런 이유로 여기서는 시간의 탄생과 본질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그 내용을 검증할 수 있는 완성된 양자론을 바탕으로 시간과 관련된 양자 현상만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현재의 완성된 양자물리학 이론에서는 뉴턴의 입장을 취한다. 슈뢰딩거 방정식에서는 뉴턴의 절대 시공간이 물리 현상이 전개되는 무대가 되고, 상대론적 양자역학에서는 특수 상대성 이론이 말하는 민코프스키 공간(Minkowski space)을 무대로 삼고 이 무대 위에서 양자 이론을 전개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양자물리학에서 말하는 시공간은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말하는 시공간의 내용과 꼭 같을 뿐 양자론의 특성은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양자론이 등장하면 인과율 등 모든 기존 상식이 이상하게 변한다. 시간과 관련해 나타나는 양자 현상을 관찰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잘 알려진 이중 슬릿 실험이면 충분하다.

아래 그림은 잘 알려진 이중 슬릿 실험이다. 이중 슬릿 A와 B의 왼쪽에서 전자를 쏘아 보내면 전자는 이중 슬릿을 지나 스크린에 도달해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스크린상에 간섭무늬를 만든다.

그런데 전자가 이중 슬릿을 지나긴 했지만 아직 스크린에 도달하기 전에, 슬릿 A, B 중 하나를 닫으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상식으로는 전자가 두 개의 슬릿을 이미 통과했으므로 스크린에 간섭무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전자가 슬릿과 스크린 사이에 있을 때라 할지라도 두 개의 슬릿 중 하나를 닫으면 전자는 간섭무늬를 만들지 않는다. 이 경우 슬릿을 향하던 전자는 마치 장차 슬릿이 닫힐 것이라는 것을 알고 미리 한쪽 슬릿을 통과한 것처럼 행동한다. 이것은 마치 미래에 일어날 일이 과거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실험 장치에서 현재 일어나는 일이 과거의 상태에 영향을 주는 것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시간을 소급하는 인과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의 상식으로는 과거 → 현재 → 미래의 순서로 사건이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그런데 양자론의 세계에서는 이런 형식의 인과율은 무시된다. 그렇다고 해서 인과율 자체가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간의 순서가 뒤바뀌어 현재와 미래의 일이 과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지면 관계상 여기서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양자 지우개(quantum eraser)는 과거를 지울 수도 있고 과거를 다시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과율이 깨진다는 것이 아니라 인과율의 의미가 바뀐다는 뜻이기도 하고 시간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양자론의 세계에서는 현재 일어난 사건의 원인이 되는 과거가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많이 있을 수 있다. 즉 과거의 중첩이 일어나는 것이다. 위의 이중 슬릿 실험에서 입자를 하나씩 보내도 간섭무늬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하나의 입자가 동시에 두 개의 슬릿을 통과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를 보통 양자론에서는 위치의 중첩이라고 설명하지만 입자의 과거가 하나가 아니라 동시에 여럿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중 슬릿이 아니고 열린 공간이라면 입자는 한 점 P에서 다른 점 Q로 전이할 때 가능한 모든 경로를 동시에 진행하게 된다. 이 모든 경로의 합을 파인만(Richard Feynman, 1918~1988)의 경로 적분(Path Integral)이라고 하는데 경로 적분은 현대 양자 장론의 기본 공식이 된다. 경로 적분에 덧붙여 시간과 관련해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살펴볼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이다. 간단한 실험을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보자.

포지트로늄(positronium)처럼 스핀의 값이 0인 입자가 둘로 분리되어 전자는 왼쪽으로 양전자는 오른쪽으로 날아가 수백 광년 떨어졌다고 하자. 그런데 양자역학에 의하면 전자도 양전자도 둘 다 측정하기 전까지는 스핀의 합이 결정되어 있지 않아서 전자의 스핀을 측정하면 그 값은 1/2일 확률이 50%이고 –1/2일 확률도 50%다. 양전자의 스핀을 측정해도 그 값은 1/2일 확률이 50%이고 –1/2일 확률도 50%다. 이제 전자의 스핀을 측정해 1/2의 값을 얻었다고 하자. 그러면 양전자의 스핀을 측정하면 무조건 즉각적으로 –1/2이 된다. 스핀은 보존되는 양이라 둘의 스핀 값을 합치면 그 값이 언제나 0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백 광년 떨어진 양전자가 어떻게 전자의 스핀이 1/2로 결정되었다는 정보를 즉각적으로 알고 그 값이 –1/2로 되는 것일까?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정보는 빛의 속도로 전달된다. 통상적으로 생각하면 전자의 스핀이 1/2로 결정되었다는 정보가 전달되기 전에 양전자의 스핀을 측정하면 –1/2이 아니고 1/2의 값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양전자의 스핀은 언제나 즉각적으로 –1/2로 결정된다. 이 문제는 벨의 정리를 발표한 벨(John Stewart Bell, 1928~1990)을 비롯해 2022년 노벨상을 받은 알랭 아스펙트(Alain Aspect, 1947~ ) 등 여러 사람들의 연구로 인해 물질계의 사물은 실재성과 분리성 둘 다 없거나 적어도 분리성은 없음이 실험적으로 확인되었다. 분리성이 없다는 것은 전자와 양자 전자가 측정 결과 우주의 양 끝에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고 할지라도 측정 전에는 둘은 분리되지 않은 단일체(Undivided Wholeness)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분리되어도 단일체로 행동하는 것을 ‘양자 얽힘’이라고 하는데 양자적으로 얽힌 시스템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한쪽에서 일어난 사건은 공간을 무시하고 즉각적으로 다른 쪽에 그 영향을 미친다.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이 시간과 공간을 비롯해 양자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의 의미가 달라진다. 끝으로 지면 관계상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한마디 덧붙일 말이 있다. 우주의 만물은 태초에 한 지점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우주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면 모든 만물은 양자적으로 얽혀 있다. 그런데 우리 앞에 전개된 시공간은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을까?

김성구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대에서 박사 학위(Ph.D, 소립자 물리학 이론)를 받았다. 이화여대 물리학과 교수를 지냈고, 퇴직한 후 동국대 불교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이화여대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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