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문제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법상 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문제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우리는 지금 이대로의 현실에 대해서 불만족스럽다. 무언가를 바꾸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 이대로의 현재에 끊임없이 저항하며, 더 나은 미래를 열렬히 희구한다. 내가 원하는 어떤 희망찬 미래를 계획해놓고는,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고, 행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당신의 모든 문제, 괴로움은 지금 이대로 여기에 있는 것들에 대해 저항하며, 다른 무언가를 희망할 때 생겨난다.
‘지금 이대로’를 희망하면, 거기에는 아무런 다툼도 아픔도 기대도 괴로움도 없다. 지금 이대로의 현재를, 지금 이대로의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아무런 일이 없다. 현재와 저항할 때만 고통은 시작된다.
지금 이대로라는 현실에는 무엇이 있을까? 마음에 드는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지금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지금 있는 것 말고,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을 상상으로 추구하면서 그것은 분명 나에게 행복한 미래를 선물해줄 거라고 믿기 시작한다.
사실 지금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실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일 뿐, 그 어떤 해석을 붙일 것도 없다. 말 그대로 ‘공(空)’하다. 그런데 그런 아무것도 아님이 싫어 지금 있는 것에 저항하기 시작한다.
지금 있는 것 말고 나에게 없는 다른 무언가를 추구한다. 바로 그 저항과 추구가 공(空)한 현실에 색(色)이라는 실체감을 부여한다. 내가 있는 이대로의 현재에 저항하는 힘만큼,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는 에너지만큼, 실체성이라는 환상이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 바로 그 실체성, 색(色)이라는 문제를 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에, 현실에 저항함으로써.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 삶의 문제를 만들어낸다.
그때부터는 내가 원하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지금 이대로의 나는 부족하고, 문제투성이고, 벗어나고 싶은 불완전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아무 문제없고, 완전한 있는 그대로의 한 부처가, 중생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 중생은 끊임없이 스스로 만들어낸 추구, 저항과 싸워 이겨야 한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 그 추구를 완성하는 것, 현실에 저항하는 것, 그것만이 삶의 원동력이 된다.
삶은 무겁고, 버겁고, 힘겹고, 해야 할 일들이 많아진다. 지치고 힘겨운 삶을 싸워서 이겨내고, 어렵게 노력해 성취해내는 것이야말로 삶의 성공이라고 굳게 믿기 시작한다. 그 허망한 성취를 향해 끊임없이 추구해 나가지만, 그리고 실제 많은 성취를 해내기도 하지만, 하나를 성취하면 또 다른 추구가 이어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나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만들었다는 자각과, 이 모든 괴로움의 구조를 깨달아야만, 지금 이대로 아무 문제없었다는 사실에 눈뜨게 된다.
지금 이대로의 나와 지금 이대로의 현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에 대한 저항을 멈추는 것만이, 이 모든 문제를 끝낼 수 있다. 나 스스로 만들어낸 실체성, 색(色)이라는 가상현실을 만드는 유위의 조작을 멈추고, 본래 있던 있는 그대로의 아무 일 없는 공(空)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만이 참된 존재의 실상이다. 입처개진(立處皆眞),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가 참된 진실이요, 진리다. 지금 여기에 공(空)이라는 진리의 실상이 고스란히 있다.
그것을 거부하지만 말라. 지금 있는 것에 저항하지 말라. 무언가를 추구하지 말라. 지금 이대로를 허용해주라. 지금 이대로이길 받아들이라. 그것이 참된 자비요 사랑이다. 그것이 참된 지혜요, 붓다의 길이다.
바로 지금 모든 생각을 멈추고, 이미 있는 이대로를 돌아보라. 지금 이대로 여기에 존재하라. 주어진 이대로의 삶을 그저 살라. 아무 문제없이.
모든 문제는 내가 만든다
내가 손을 펴서 내보인다. 이 손은 그저 보일 뿐, 좋거나 나쁜 무언가가 아니다. 사실은 손인 것도 아니고, 무언가가 그저 보였을 뿐이지만, 우리는 곧장 분별심을 일으켜, ‘스님의 손’이라고 분별한다. 혹은 남자의 손, 큰 손 하고 분별한다. 사실 분별하지 않으면 그저 볼 뿐이다. 지금 이 손은 그저 보일 뿐, 당신을 휘두르지 않는다. 이 손에 끌려갈 이유가 없다.
그런데 갑자기 이 손에서 가운뎃손가락 하나만 펴고 나머지 손가락을 접어서 당신에게 들어 보인다고 치자. 갑자기 불쑥 화가 올라온다.
‘스님이 어떻게 나에게 저런 저급한 욕을 할 수가 있어?’
잠시 후 다시 미안한 듯 웃으며,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어 보인다. 순간 그럼 그렇지 하고 안도한다. 혹시 어떤 사람은 저 스님이 나를 좋아하는가 보다 하고 느낄 수도 있다.
다시 처음의 손으로 돌아가보자. 그 손은 그저 보였을 뿐이다. 그것은 나를 괴롭히지도, 나를 행복하게 하지도 않는다. 중립적이다. 그저 그럴 뿐. 여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런데 중간 손가락이 올라가자 화가 나고, 하트가 만들어지자 행복감이 느껴진다. 왜 이럴까? 손가락이 뭐라고? 우리는 특정한 손가락의 모양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한 채, 그 의미에 사로잡힌다. 그 의미를 따라가며 울고 웃는다.
사실 손가락에는 그럴 힘이 없다. 당신을 괴롭게 하거나 즐겁게 할 힘이 없다. 그 손가락에 그 힘을 부여한 것은 내 쪽이다. 내가 분별했기 때문에, 그 손가락이 나를 괴롭히고 안심시킨 것일 뿐이다. 내가 가운뎃손가락의 의미를 몰랐거나, 그때 다른 생각을 했더라면 그것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다. 즉 내가 그렇게 인식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생각을 믿었기 때문에 괴로워졌을 뿐이다.
결론! 손가락은 아무 잘못이 없다. 경계는 언제나 무분별이고, 그저 그럴 뿐이다. 언제나 내 쪽에서 그것을 분별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겨난다. 모든 문제는 내가 만든다. 당신이 문제를 만들지 않으면, 세상 모든 보이는 것들은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법상 스님|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공부하다가 문득 발심해 불심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여 년 군승으로 재직했으며, 온라인 마음공부 모임 ‘목탁소리(www.moktaksori.kr)’를 이끌고 있다. 현재는 유튜브 ‘법상스님의 목탁소리’를 통해 16만 명의 구독자와 소통하고 있고, ‘헬로붓다TV’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상주 대원정사 주지, 목탁소리 지도법사를 맡고 있으며, 저서로 『보현행원품과 마음공부』, 『육조단경과 마음공부』, 『수심결과 마음공부』, 『도표로 읽는 불교교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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