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초와 연의 노래|이호신 화가의 생태 그림 순례

파초와 연의 노래


그림/글  이호신 화가


연(蓮)의 노래, 74×143cm, 한지에 수묵 채색, 2025년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에서/ 쉬리라 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 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 조지훈의 「파초우(芭蕉雨)」 중에서


순전히 이 시를 애송하는 까닭에 뜨락에 파초를 심고 비를 기다린다. 스무 해도 넘게 서귀포 감산마을에서 귤을 보내주는 이에게 파초 뿌리를 선물 받았는데 그만 죽이고 말았다. 이 상실의 아픔이 커 다시 산마을에서 파초를 구해 심고 애지중지 철마다 너른 잎을 보고 있다. 푸른 바람 속에서. 더불어 이태준의 수필 『파초』에서 공감이 크니 마냥 기쁘다.

파초는 언제 보아도 좋은 화초다. 폭염 아래서도 그의 푸르고 싱그러운 그늘은, 눈을 씻어줌이 물보다 더 서늘한 것이며 비 오는 날 다른 화초들은 입을 다문 듯 우울할 때 파초만은 은은히 빗방울을 퉁기어 주렴(珠簾) 안에 누웠으되 듣는 이의 마음에까지 비를 뿌리고도 남는다. 가슴에 비가 뿌리되 옷은 젖지 않는 그 서늘함, 파초를 가꾸는 이 비를 기다림이 여기 있을 것이다. 

마침내 비가 내리니 산은 주렴에서 보듯 원경으로 물러가고 파초와 빗방울이 리듬을 탄다. 수직으로 떨어진 비가 파초 잎에서 물꽃놀이를 한다. 오르한 파묵(노벨문학상 수상자)은 그림일기에서 “모든 물방울은 하나의 단어 단어”라고 쓰고 실제 빗방울을 단어로 표현했다. 나는 그 비유에 힘입어 비와 물방울을 화면에 쏟고 또 흘렸다.

한편 초여름이면 수많은 연지(蓮池)가 떠오른다. 그중 함안의 연꽃 단지에서 연꽃 사랑에 빠져 사는 이가 있으니 여류(如流) 이병철 시인이다. 그는 연꽃 사진과 함께 『애련일지(愛蓮日誌)』를 펴냈다. 


파초와 비, 180×88cm, 한지에 수묵 채색, 2023년


오늘 아침에도 연지로 나가/ 밤새 해맑게 피어난 연꽃 앞에 합장하며 안부를 묻는다/ 남은 생애에 한 번이라도 저 연꽃을 닮을 수 있기를/ 그렇게 당신 앞에/ 한순간만이라도 환하게 피어날 수 있기를  - <서시> 중에서


연꽃을 생각하면 형상의 우아함과 함께 염화시중(拈華示衆)이 떠오른다. 인도 영취산에서 붓다가 설법 중 연꽃 한 송이를 들어 올리자 가섭존자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 빙그레 웃었다는 이야기. 이것은 꽃을 통한 무언의 교감이요, 무위법(無爲法)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과 함께 연은 “진흙탕 물에도 결코 오염되지 않는다(處染常淨)”는 것. 연잎이 흔들려 결코 빗물을 가두지 않는 법이라는 점에서도 깨달음이 있다. 욕망을 비우고 스스로 지분(知分)하라는 뜻으로서 말이다.

바람 부는 날 연지에 이르니 연꽃의 자태는 실로 천태만상이다. 이 아름다운 조화의 노래를 어찌하랴! 꽃과 잎이 천지(天池)를 아우르니 마침내 연꽃은 지상(地上)을 떠나 내 가슴에 피어나고 있다.  



이호신|화가. 자연생태와 문화유산을 생활산수로 그리고 있다. 개인전 29회를 개최했고, 여러 화문집을 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이화여대박물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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