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베드카르, 불교를 통해 인도의 불평등 문제 해결에 나서다|세계의 선사로부터 배우는 불교

암베드카르 

불교를 통해 

인도의 불평등 문제 

해결에 나서다


정세근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1891~1956)


감회 

틱낫한, 달라이 라마, 스즈키 다이세츠, 숭산을 다루며 한국 불교가 드디어 암베드카르를 말하게 되었다니, 감회가 깊다. 

틱낫한은 석일행(釋一行) 스님으로 미국과 프랑스 등에서 그 영향력이 크다. 프랑스의 자두 마을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이끄는 것은 잘 알려져 있으나, 그가 베트남 전쟁 때 ‘참여불교(Engaged Buddhism)’의 주요 인물이었던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버젓이 앉은 채 분신(소신공양)하는 스님의 모습은 어린 나로서 충격이었다. 틱낫한은 마음속에서 그 빚을 잊지 못할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 같은 것 말이다. 

달라이 라마는 공산당의 탄압으로 티베트를 마주 보는 인도 국경에서 망명정부를 이끄는 인물이다. 삭발 스님의 머리를 곤봉으로 내려치니 피가 잘 튀더라. 머리카락이 있으면 피가 그래도 안으로 흐를 텐데 스님들은 그렇지 않더라. 그럼에도 그의 불교라는 종교적 신념에 따른 비폭력과 평화의 메시지는 현대인의 심금을 울린다. 

스즈키 다이세츠가 없었다면 서구인의 불교 이해가 이렇게 일반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 학계에서 일찍이 불교를 연구했지만, 일상의 영어로 철학적 맥락을 그처럼 잘 드러낸 사람은 없다. 한마디로 ‘젠(Zen)’, ‘사토리(깨달음)’라는 일본어가 불교의 참선을 대표하게끔 한 인물이다.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에게 배웠던 미국인 아내 덕분에 그의 번역은 더욱 빛을 발했다. 마치 한강 소설의 프랑스어 번역이 한불 부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숭산은 마침내 한국의 선을 세계인에게 알린 스님이다. 그렇게 쉬운 영어로, 이렇게 어려운 불교를 전 세계에 전하고 다녔다. 외국인을 위한 국제선원과 무상사를 세웠고, 그의 미국인 제자 현각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다. 그는 달라이 라마, 틱낫한과 견줘졌다. 그의 유명한 말은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 and Keep the Don’t know mind!)’

이런 이야기를 짧은 지면에 하는 까닭은 암베드카르도 당연히 앞의 큰 스승과 견줘질 수 있는데도 한국의 불교계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인도를 가보라. 큰길의 이름이 간디 길이면, 그 큰길을 교차하는 또 다른 큰길은 암베드카르 길이다. 그만큼 인도에서는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다. 

암베드카르는 천민, 아니 카스트에도 끼지 못하는 불가촉 출신이다. 흔히 카스트는 알아도 ‘카스트 밖(outcast)’은 모른다. 아직도 인도가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알아도, 거기에 끼지도 못한 사람들이 빨래터(도비가트)에서 양잿물 냄새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은 모른다. 그들은 마을로 들어오지도, 공동 우물을 쓰지도 못한다. 

영국 식민지 시절 암베드카르는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법학 박사를 받고 귀국했고 제헌의원으로서 역할을 했어도 그가 설 곳은 없었다. 그래서 인도에서 만들어진 것이 10% 남짓의 ‘예약제(Reservation)’라고 불리는 할당제다. 그러나 아직도 길에서 태어나고 길에서 죽는 그들이 그 할당을 채울 일은 없다. 


 

1956년 10월 14일 나그푸르에서 연설하는 암베드카르와 이를 경청하고 있는 달리트들(출처|법보신문)


천민 불교 

인도에서 불교는 천민의 종교다. 많은 불교학자도 이를 인정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상하고 수준 있는 불교가 인도에서는 왜 천민의 불교인가?

암베드카르는 불가촉의 불평등을 해결할 방법은 힌두교를 벗어나는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슬람과 불교 사이에서 고민하다 마침내 불교를 선택한다. 그 결과가 그의 ‘신불교론(Neo-Buddhism)’이다. 

불기 2500년을 기념해 1956년 10월 14일 암베드카르는 그의 부인, 그리고 50만 명이 참여한 개종식에서 22개의 불교도 맹세문을 내세운다. 그 가운데 5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붓다가 비슈누의 화신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믿어서도 안 된다. 나는 그것이 아주 미친 짓이고 잘못된 선전이라고 믿는다.” 

얼마나 다들 부처를 비슈누의 화신이라고 여겼으면 그렇게까지 강력하게 말할까. 그리고 얼마나 애절했으면 ‘인류의 평등을 믿어야 하고, 평등을 이루려고 애써야 한다’(제9, 10조)고 외칠까. 이렇게 암베드카르에게 힌두교는 불평등의 종교이고, 불교는 평등의 종교였다. 

인도의 불교 사원(절)을 가보자. 부처님상 옆에는 거의 빠짐없이 두꺼운 안경을 쓴 암베드카르의 흑백사진이 놓여 있다. 위의 50만은 모두 천민이었고, 그들이 불평등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불교만이 해답이었다. 암베드카르는 불교를 내세워 현실을 타파하고자 했던 불가촉 집단의 지도자였다. 

이제 인도에서 절을 찾는 이들은 모두 천민인 셈이다. 인도에서 불교 천 년 동안 들린 평등의 외침은 묻혀버리고 다시금 불평등의 사회로 회귀한 것이다. 

불교 초전지 사르나트 10km 아래에 있는 바라나시힌두대학을 가보자. 거기에는 링감에 우유와 꽃을 뿌리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방의 신 가운데 하나가 부처다. 힌두교도에게 부처는 비슈누의 화신일 뿐이다. 부처는 그렇게 거기서 남근을 멀거니 바라보면서 하루를 보낸다. 부처는 3만 3,000의 신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암베드카르의 맹세문 가운데 19조를 보자. 

“나는 인간성에 해가 되며, 인간성의 진보와 발전을 저해하는 힌두교를 그것이 불평등에 기초하기 때문에 부인하고, 불교를 나의 종교로 받아들인다.” 

우리의 삶에서 평등이 얼마나 중요하면 일본에는 ‘보됴인(평등원; 平等院)’이라는 이름의 절이 있을까. 그들은 그곳을 ‘극락이 의심스러우면, 우지의 그 절에 가보라’고 자랑한다. 

내가 경험한 암베드카르와 관련한 두 이야기. 

첫째, 그의 『신불교론』을 보관한 국립문서보관소를 찾았다. 그냥 캐비닛에서 꺼내 던져주더라. 푸른 잉크로 수정한 자국이 있는 타자본이다. 어찌 그의 『신불교론』이 대접받길 원했더냐. 

둘째, 2024년 세계철학대회에서 암베드카르를 발표한다고 해서 신나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발표자의 답변은 ‘어찌 카스트가 없어지겠냐’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힌두교와 비슷해진 대승불교 연구자였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대승불교가 『바가바드기타』의 사상을 받아들이면 불교는 더 이상 독자성을 갖지 못한다. 『인도철학사』로 유명한 라다크리슈난의 말로 대신하자. “대승불교의 형이상학은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 Advaita Vedanta)의 형이상학과 유신론에 상응한다. 다수 대중의 필요에 기여하는 가운데, 그것은 『바가바드기타』의 아류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 대승불교는 비슈누교의 한 종파로 전락한다. 소승불교는 시바교의 한 종파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인도 냄새

인도로 가는 비행기에서 한 스님이 나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하신다. 누구의 말씀인데, 스님이 하라면 해야지. 그런데 하시는 말씀이 “인도 사람 냄새를 참지 못해서”란다. 그래서 나온 나의 부덕한 대꾸, “부처님도 그런 냄새 나셨을 텐데요.”

불평등을 벗어나고자 싯다르타는 불경에 나오는 바라문(婆羅門)을 비판했다. 그것이 브라만교라고 불리는 인도의 힌두교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급을 정당화하는 힌두의 『마누법전』과 『베다』, 나아가 『바가바드기타』에 매달리고 있지 않은지 묻고 싶다. 암베드카르는 계급 질서를 규정하는 힌두교의 『마누법전』을 공개적으로 불태워버렸다. 마찬가지로 윤회는 벗어나야 할 것이고 연기야말로 세계의 진상이라고 생각한다면, 한국의 불교는 힌두의 전통 사상에서 흘러들어온 윤회보다는 청년 붓다의 깨달음인 연기에 매달려야 하지 않을까? 

암베드카르는 불교를 통해 인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세계 종교의 역사상 50만이 한때에, 그것도 자발적으로 개종한 역사가 있는가. 그는 부처상을 안고 그 고난의 길을 걸었다.  


정세근|국립대만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한국철학회 제53대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충북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노장철학과 현대사상』, 『윤회와 반윤회』, 『마음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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