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고 남을 알고자 하면 소통할 수 있다|2024년 캠페인 "우리 함께해요!"

나를 알고
남을 알고자 하면
소통할 수 있다

성태용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우선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철저히 인정하자
부처님의 가르침, 연기설과 동체대비(同體大悲)를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이란 함께 살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荀子)도 사람이 사람다운 까닭은 바로 사회를 이루어 살기 때문이라 했다. 순자는 그것을 군(群)이라는 글자로 표현했는데, 그것은 단순히는 무리를 짓는다는 뜻이겠다. 그렇지만 정말 단순히 무리를 짓는 것이 사람이 사람다운 점일 수는 없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서로를 인정하고, 자기와 남의 분수를 정해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아야 하며, 수직적 분업과 수평적 분업 구조를 이루어 함께하는 것의 효용을 극대화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함께한다는 것이 오히려 문제를 일으켜 스스로를 멸망시키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들일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우리 함께해요!”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다시 힘주어 외치게 되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큰 원칙들이 무너지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그것이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큰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장 극단적인 모습은 바로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양극화’가 아닐까 싶다. 옳고 그름을 전혀 가리지 않고 오직 네 편이냐 내 편이냐만을 따지는 모습 속에는 ‘함께’가 완전히 실종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상황이기에 단순히 “우리 함께해요!”를 당연한 명제로 내세우고 거기에 동참하라는 것은 정말 실효성 없는 공염불에 그치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꼼꼼하게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함께하기 위한 근본 조건이 무엇인가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온전히 다시 세운다는 마음으로 우리 함께하는 길을 다시 모색해야 한다.

“우리 함께해요!”를 말하는 바탕에는 같음(同)과 다름(異)이라는 두 축이 있다. 『주역(周易)』에서 지향이 다른 두 존재가 같은 곳에 있으면서 갈등을 빚는 괘(卦)를 풀이하면서 ‘함께하면서도 다르게 함[同而異]’을 배운다고 한 것이 문제의 본질을 잘 드러내준다. 우선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철저히 인정하자. 그리고 그 ‘다름’은 갈등과 투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지만, 화합과 조화를 이루어 커다란 공동의 선(善)을 함께 이루어나가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큰 긍정의 관점을 가지자. 그리고 그렇게 이상적인 결과를 지향해나가는 인류의 발걸음이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 또한 바로 보자.

우리 스스로, 우리 불자들 스스로 사명감을 가지고
먼저 함께하는 길에 앞장서는 주체적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함께 지향해야 할 공동의 선(善)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길은 이미 반 이상 막혀 있다. 극단적인 양극화의 현실은 그런 시도를 그 시작에서부터 양극화의 수렁으로 끌고 들어가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조심스럽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서로 알아가요!”가 아닐까 싶다. 배척하고 지탄하기 전에 “저 사람은 왜 저런 생각을 하고 왜 저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하는 물음을 던지는 조심스러운 시도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조차도 힘든 현실이지만, 그래도 우리 공동의 지향점을 찾아보자는 시도보다는 훨씬 현실적이 아닐까?

아니다. 현실적이 아니다. 이렇게 추상적으로 “서로 알아갑시다!”라고 말해봐야 그 또한 양극화라는 암초에 부딪혀 얼마 가지 못하고 좌초되는 미래가 눈에 선하다. 그렇게 “너와 내가 함께해봅시다” 하는 식으로 움직이는 것은 정말 현실성이 없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 불자들이 스스로 사명감을 가지고 서로 알아가고, 그리하여 함께하는 길에 앞장서는 주체적 운동을 일으키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가 서로 함께하는 데 가장 훌륭한 가르침이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상호 의존성을 말하는 연기설이 그러하고 중도사상이 그러하며, 우리의 위대한 선현인 원효의 화쟁사상이 그러하다. 그러한 가르침들을 올바르게 펼쳐 우리 현실에서 ‘함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나를 알고, 또 남을 알아가는 길이 이어지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발견된다
그러한 걸음에 가장 장애가 되고 힘들다고 느껴질 분야, 타 종교, 특히 기독교와 함께함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다. 우리 한국의 한 독실한 기독교인이 외국의 신학대학원에 유학을 갔다. 그 대학원의 학생들이 “너희 나라는 불교문화가 오래 지속되었으니 네가 우리에게 불교를 조금 소개해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그 학생은 “난 기독교인이라 불교는 모른다”고 당당하게 대답을 했다. 결과적으로 그 학생은 졸업 때까지 제 나라 문화도 모르는 학생으로 무시를 당했다 한다. 불자의 입장에서 기분 좋은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런데 한번 입장을 바꾸어서 이야기해보자. 우리 불자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신구교를 합하면 세계에서 가장 신자가 많은 기독교에 대해서 말이다. 기독교의 바이블 한번 본 불자는 얼마나 될까? 정말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기독교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우리 불자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서 그들과 ‘함께하자’고 말할 수 있는가?

불전도 잘 읽지 않는 불자들에게 너무 어려운 주문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기독교의 바이블을 읽다 보면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가에 대해 되묻게 된다. 그렇기에 오히려 불교 공부를 촉진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남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앎이 먼저여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자연히 나를 알고 또 남을 알아가는, 상호 보완적이며 상승적인 길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단적인 예를 들었을 뿐이다. 본디 나를 알고 남을 알아, 함께하는 길 자체가 그러하다. 그렇게 나를 알고, 또 남을 알아가는 길이 이어지면, 자연 그 속에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발견되고, 그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함께함’으로 한 걸음을 떼어놓을 수 있다. 그 길로 죽 나가 함께 지향해야 할 공동의 목표를 발견한다면 “우리 함께해요!”가 이상적으로 실현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분명하게 같은 목표를 찾지 못해도 좋다. 우리들이 서로 다르지만, 그래도 공동의 이상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다는 믿음만 얻어낼 수 있어도 충분하다. 그 믿음 위에 우리는 ‘함께하고’ 있는 것이니까!

이렇게 시작해보자. 그리고 조심스럽게 우리와 다른 이들에게 “우리 함께해요!” 하며 손을 내밀어 보자.

성태용|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건국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월간 『불교문화』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한국철학회 회장, 학술진흥재단 인문학단장, 우리는선우 대표를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주역과 21세기』, 『어른의 서유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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