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는 균형이 아닌 혁명이다 | 10분으로 배우는 불교

중도

정준영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중도는 깨달음의 길이자 방법이다
중도(中道)는 한자어로 ‘가운데 길’이라는 뜻이다. 이쪽 길도 아니고 저쪽 길도 아니고 가운데 길을 가라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간의 자리, 혹은 균형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붓다 역시 균형을 설하신다. 폭류의 비유도 있고, 비파의 비유도 있다. 하지만 균형과 중도는 다르다. 붓다가 중도를 처음으로 설하신 장면은 첫 번째 설법이라고 부르는 초전법륜(初轉法輪)이다.

그는 그 당시의 철학적 흐름 안에서 멀리해야 할, 즉 버려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서, 중도를 완전히 알게 되어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말한다. 중도는 깨달음의 길이자 방법이다. 그렇다면 초전법륜의 중도는 무엇일까?

중도는 양쪽의 균형을 잡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양쪽을 모두 버리고 새롭게 가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양쪽은 무엇일까? 하나는 ‘고행주의’고 다른 하나는 ‘쾌락주의’다.

잘못을 범하고 대가를 치르려는 고행주의자
한쪽 극단, 고행주의로 가보자.
나는 인도 밑에 있는 작은 섬나라, 스리랑카에서 공부했다. 혼자 자취를 했는데 어느 날인가 이른 아침에 요란한 나팔 소리, 북소리가 시끄러워 잠에서 깼다. 무슨 행사를 하나 하는 마음에 집 앞으로 구경을 나갔다.

다양한 악기 소리와 함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줄을 서서 가는데 호기심에 조금 더 다가가 바라보고는 깜짝 놀랐다. 몇몇 사람들이 긴 못이나 바늘 같은 도구로 혀도 뚫고, 살도 뚫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많이 아플 텐데… 이 사람들은 왜 그럴까? 이들은 스스로를 벌하는 것이다. 삶을 살아가며 자신들이 행한 부정한 행위에 대한 벌을 자신에게 내리는 것이다. 이들을 고행주의, ‘앗타킬라마타누-요가(attakilamathanu-yoga)’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들은 몸과 영혼이 분리된 것이라 믿었다.(aññaṁ jīvaṁ aññaṁ sarīraṁ) 수명에 따라 몸은 죽어도 영혼은 계속 산다고 믿었다. 따라서 나쁜 짓을 하는 몸보다 순수하고 맑은 영혼이 더 중요했고, 잘못한 몸을 벌해야 영혼이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벌을 받고 죗값을 치르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사회법을 집행하는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잘못을 범하고 그 대가를 치르면 용서받는 구조. 어떻게 보면 고행주의자들의 믿음은 오히려 순수하다. 일부 이해가 된다. 이들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 자신의 몸을 벌하고 용서를 구한다.

살아 있는 동안 감각적 욕망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쾌락주의
다른 쪽의 극단은 쾌락주의다.
이들은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믿었다. 몸과 영혼은 함께 움직이며, 몸이 죽으면 영혼도 따라 죽는다. 몸이 곧 영혼이다.(Taṃ jīvaṁ taṃ sarīraṁ)

결국 살아 있는 동안 즐겁고 행복해야지, 사후의 세계는 없다는 것이다. 죽으면 그만이기에 살아 있는 동안 감각적 욕망과 즐거움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들을 쾌락주의, ‘카마수칼리카누-요가(Kamāsukhallikānu-yoga)’라고 부른다. 그러다 보니 업(業, kamma, karma)과 업의 과보도, 윤회도 믿지 않았다. 이들은 무아윤회를 부정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이 있던데,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나는 오늘 그냥 사과를 먹겠다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내 안에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없다
붓다는 죽으면 영원히 산다는 상주론, 그리고 죽으면 윤회하지 않고 끝난다는 단멸론을 양극단으로 보고 부정한 것이다.

붓다는 영원히 살기 위해 필요한 영혼, 아트만(ātman)을 부정한다. 내 안에 고정되어서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체의 구원을 위해 누군가에게 용서받을 일은 없다.

동시에 실체가 없어도 업과 업의 상속은 내세로 이어지기에, 착한 마음으로 착한 행위를 할 것을 강조한다. ‘죽으면 그만이니 이 세상 즐기다 가면 그만이다’는 생각은 저속하고 열등하다고 표현한다. 불교 안에서도 윤회를 부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은데 아마도 쾌락주의와의 차별을 설명하지 않는 한 오해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도는 양쪽을 두루 섭렵하는 균형의 의미가 아니라, 양쪽을 부정하는 새로운 길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로운 이 길을 위해 팔정도(八正道), 삼학(三學)이라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다.

인도 북동부의 바라나시 근처에서, 35세의 젊고 잘생긴 사람이 기존에 없던 새로운 가르침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것이 불교의 시작이다. 붓다의 중도는 균형이 아닌 혁명이다.

정준영
스리랑카 국립 켈라니아대학교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주제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명상학 전공 교수로 있으면서 대원아카데미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 다른 명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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