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은 왜 생기고, 어떻게 없앨 수 있나

집성제,
괴로움의 근본 원인을 밝혀 그것을 없애다

화령 정사
불교총지종 정사, 보디미트라 ILBF 회장


우리가 살아가면서 괴로움을 모른다면 굳이 종교를 찾을 이유도 없다. 사람들은 자기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어떤 것에 몰두하거나 혹은 쾌락을 찾는다. 그러나 그러한 몰두는 집착을 일으켜 더 큰 괴로움이 생기게 된다. 쾌락 또한 그 끝에는 허무와 절망이 있으며 결국은 파멸을 가져온다. 철학적인 모색으로 삶의 의의를 발견하려고도 하지만 그것 또한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쉽게 의지할 수 있는 종교를 찾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는 괴로움의 원인을 분석하고 거기에 대한 합리적인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인 믿음만 강요한다. 어떤 종교는 지금 세상에서의 행복을 강조하고 어떤 종교는 죽어서의 행복을 미끼로 내건다. 대부분의 종교는 자기들의 신을 설정해놓고 신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신의 가르침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데 괴로움에서 벗어나질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이 종교들은 실은 모호한 신의 이름 아래 괴로움을 잠시 잊고자 하는 마취약에 불과하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신의 설정을 ‘얼굴도 모르는 미인을 사모하는 것과 같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괴로움을 철저히 분석하고 괴로움의 실체를 안 다음 그것에서 벗어나는 합리적인 방법을 말해준다.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을 불교에서는 집성제(集聖諦)라고 한다. 괴로움의 원인을 밝힌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이다. 집성제의 집(集)은 산스크리트어로 사무다야(samudaya)라고 하는데, ‘모여서 일어난다’, ‘함께 일어난다’라는 뜻이 있다. 즉 여러 가지 인과 연이 모여서 현상을 발생시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의 현상은 곧 괴로움을 말한다. 즉 고성제에서는 삶이 고(苦; 괴로움)라는 것을 밝히고, 집성제에서는 그 고가 발생하는 원인을 밝혀서 그것이 번뇌에 기인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경전에서 붓다는 집성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윤회하여 다시 태어나게 하고 쾌락과 탐욕을 수반하며 모든 것에 집착하는 갈애는 고가 일어나는 원인에 관한 신성한 진리[집성제]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가 생기는 집의 성제이니 마땅히 들어라. 미혹을 일어나게 하고, 기쁨과 탐심을 수반하며, 모든 것에 집착하는 갈애가 그것이다.

우리를 괴로움 속에서 윤회하게 하는 원인이 쾌락과 탐욕을 수반하는 갈애(渴愛)에 있다는 말씀이다. 갈애는 목마른 자가 물을 찾는 것처럼 욕망에 가득 차서 집착하는 마음을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갈애가 곧 번뇌이다. 번뇌는 산스크리트 kleśa의 의역으로서, 우리의 심신을 어지럽혀 괴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갈애는 목마른 사람이 바닷물이라도 들이켜는 것처럼 잘못된 맹목적인 집착이기 때문에 무명이 당연히 그 근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명은 곧 번뇌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갈애에는 욕애(欲愛)·유애(有愛)·무유애(無有愛)의 세 가지가 있는데 어느 것이나 무명이 그 근본 원인이 된다. 욕애는 남녀의 정욕이라든가 재산·명예·권력 등에 대한 세속적 욕망이다. 유애란 존재에 대한 욕구로서 사후나 내세에도 영원히 행복과 쾌락을 누리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현세가 매우 불만족한 상태에 있을 때 죽어서 천당에 태어나기를 바란다거나 영생을 원하는 것이 유애이다. 무유애란 존재가 없는 허무를 바라는 욕구이다. 천상의 복락도 일시적인 것으로서, 복이 다하면 다시 고계(苦界)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이 생에서든 저 생에서든 존재 자체를 원하지 않는 허무의 상태로 되고자 하는 것이 무유애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욕구도 잘못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애라는 것은 좋아하는 것에 집착해 탐심을 일으키는 것만이 아니라 싫어하는 대상에 대해 미운 마음을 내는 것도 포함된다. 그렇기 때문에 애는 탐욕과 진에(瞋恚; 성내는 것), 그리고 진리에 대해 무지한 우치(愚癡; 어리석음)의 근본 번뇌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이른바 탐·진·치 삼독이다.

괴로움을 발생시키는 근본 번뇌
탐·진·치를 삼독이라 하는 것은 이 세 가지가 근본 번뇌가 되어 모든 괴로움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번뇌를 다른 말로는 혹(惑)이라고 한다. 이 혹이 업을 짓게 만들고 그 업에 의해 우리는 고를 받게 된다. 업력에 의해 생을 거듭하면서 고를 받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즉 혹 → 업 → 고 → 혹 → 업 → 고의 구조로 윤회가 이루어지는데, 이 혹 → 업 → 고의 구조를 삼도(三道)라고 한다.

모든 중생은 혹, 즉 번뇌와 거기에 기인한 행위인 업에 의해 삼계육도의 고의 세계에 거듭 태어나서 끊임없이 윤회한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삼계는 윤회의 고의 세계를 정신적 경지의 정도에 따라 구분한 것으로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셋으로 나눈다.

욕계는 감각적인 욕망이 강한 세계로서 우리 인간의 세계가 여기에 속하며 천상계의 일부도 포함된다. 색계는 감각적인 욕망은 없지만 물질적인 것은 남아 있는 세계이다. 무색계는 물질적인 것이 없는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으로만 이루어진 세계이다. 육도는 윤회의 고의 세계를 천·인·아수라·축생·아귀·지옥의 여섯 가지 세계로 나눈 것을 말한다. 즉 생존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구분한 윤회의 세계를 육도라고 한다. 육도를 윤회하는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근원이 되는 혹, 즉 번뇌를 제거해야 한다.

불교에서는 번뇌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분류해 분석하고 있다. 흔히 ‘백팔번뇌’라고 말하지만, 실은 번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크게 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번뇌 덩어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번뇌도 크게 나누면 탐욕(貪慾)·진에(瞋恚)·우치(愚癡)의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이것을 간단하게 탐·진·치 삼독의 번뇌라고 말한다.

탐욕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취하고 싶다는 욕심을 내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물건이나 지위나 명예, 혹은 이성에 대한 욕심 등 인간사의 모든 것이 욕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진에는 자기가 싫어하는 대상에 대해 화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싫어하는 것에 대해 화를 내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취하지 못했을 때에도 진에는 일어난다. 탐욕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라면 진에는 싫어하는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집착으로서, 이것은 자기의 심신을 괴롭히고 나아가 악한 행위를 저지르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번뇌의 밑바탕에는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은 가지려고 욕심내고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화를 낸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성향으로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심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여기에 대한 주의를 크게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무의식을 매우 중요시한다. 이러한 심리와 거기에 따른 작용이 업의 축적으로서 나타나고, 그것이 윤회를 거듭하면서 고를 받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탐욕과 진에와 더불어 보다 근본적인 번뇌는 우치라고 할 수 있다. 우치란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을 말한다. 진실을 진실 그대로 보지 못하고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해 미혹된 것을 우치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다른 말로 무명이라고 한다. 무명은 지혜에 반대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특히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의 진리를 모르고 자기중심적인 판단과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을 일컫는다. 십이연기의 첫머리에도 무명이 자리 잡고 있듯이 무명이라는 우치의 번뇌는 모든 업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이것이 결국은 고를 낳게 된다. 이처럼 집성제에서는 고의 근본 원인이 번뇌라는 것을 밝혀서 그것을 제거할 기틀을 마련하는 데에 의의가 있다.

화령 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교총지종 교육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보디미트라 ILBF(국제재가불교포럼) 회장으로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 『불교 교양으로 읽다』, 『담마빠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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