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어울림의 종교다 |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는 어울림의 종교다 


화령 정사 

불교총지종 정사, 보디미트라 ILBF회장



불교에서는 이 우주를 서로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서로 의존 관계에 의해서 생성되고 변화하고 소멸해가는 것으로 본다. 다른 종교에서는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불교적으로는 창조주라는 존재도 인정하지는 않지만 비유로서 창조주라는 것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창조주는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었을까? 왜 쓸데없이 인간을 만들어 스스로를 번거롭게 할까? 피조물들은 또 무슨 죄가 있어 생로병사를 되풀이하며 괴로워해야 할까? 그들의 논리로는 인간은 오직 신을 찬양하고 그 대가로 영생을 얻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선전한다. 불교적 관점으로 해석하면 창조주는 피조물 없이는 스스로 존재할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하찮은 존재로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들 말대로 신이 있다고 쳐도 어쩔 수 없이 신과 피조물은 서로 의존해야 하는 관계다. 이런 엉터리 상상 속에서도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해 존재한다는 것을 조금만 관찰해도 알 수 있다. 눈이 있어도 볼 대상이 없으면 의미가 없으며 볼 대상이 있더라도 시력이 없으면 보는 세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몇 억 광년 너머에 다른 우주가 있지만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그런 것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다. 물론 우주의 한 부분이 변화하거나 무너지면 몇 억 광년 뒤에는 지구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렇게 거창하게까지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것만 보더라도 우리의 삶은 주위의 인간과 환경에 의지해 있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마련하기가 극히 어렵다. 물론 나도 누군가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되어 그들의 삶을 돕고 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께서는 처음으로 진리를 깨달으시고 이를 설명할 때 갈대 묶음의 비유로 만유가 서로 의지하고 있음을 설명하셨다. 즉 두 개의 갈대 단이 서로 기대어 서 있다가 어느 한쪽이 쓰러지면 다른 한쪽도 쓰러지는 것처럼, 모든 것은 서로에 의지해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사라지면 이것이 사라진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 것은 책상과 의자가 있기 때문이다. 또 책상과 의자가 놓이고 내가 발을 디딜 수 있는 바닥이 있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다. 또 내가 디디고 있는 바닥은 기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확대해나가면 모든 것은 서로에게 의존해 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이것을 또 미시적으로 살펴보면 책상 또한 나무와 못에 의지해 책상이라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나무와 못도 수많은 분자의 결합에 의해 나무와 못이라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 분자를 더 세분하면 원자니 중성자니 하는 것들로 결합되어 있을 것이다. 각각의 부분들이 전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부분’이라는 말을 썼지만 어떤 것을 형성하는 ‘부분’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공간적 의존 관계의 연기에서는 그러한 부분도 결국은 또 다른 것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마치 자동차의 여러 부품들이 결합해 자동차라는 하나의 움직이는 도구를 만들어내지만 그러한 부품들도 잘게 쪼개면 또 다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같다. 어느 한 부분이 빠지면 자동차로서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요소와 부품들이 결합되어 하나의 존재를 나타내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개개의 존재물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나 경제, 환경 등의 문제도 이와 같은 공간적 의존 관계의 연기에 의해 발생하고 존재한다. 여기에 50대 중년의 한 남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어떤 사람의 남편이다.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고 또 누구의 아들이 된다. 회사에서는 여러 직원을 거느린 부장이면서 사장 밑에서 일하는 고용인이다. 학교에서는 학부형이 되고 단골 식당에서는 손님이 된다. 선거 때는 유권자가 되고 동창회에서는 동창회 총무가 된다. 이런 식으로 이 50대의 중년 남자는 자기의 역할이 주위 관계에 의해서 달라진다. 주위의 관계성 위에서 자기의 존재 이유가 나타나는 것이다. 처음부터 아들이고 아버지고 남편인 것이 아니다. 주위의 관계성 속에서 자기라고 하는 것이 의미 있게 된다. 또 이 남자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음식물이 공급되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농사를 지어 운반해 오고 밥솥을 만들어 밥을 지어 밥상에 올린다. 쌀 한 톨이 입에 들어오기까지 거기에 관여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자기는 외롭다 외롭다고 말하지만 어떻게 보면 온 세계가 이 남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것을 굳이 이름 붙이자면 공간적 연기라고 할 수 있다. 연기(緣起)란 서로 의지해 관계를 맺는 가운데에서 사물과 현상이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의미다. 

공간적 의존 관계의 연기에서는 시간적으로 동시인 것도 있으며 시차를 두는 경우도 있다. 시간적으로 동시인 것은 건물이나 책상처럼 어떤 사물이 일시적으로 일정한 형태를 지속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것은 공간적으로 서로 의존해 일정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공간적 의존 관계에서 시간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은 사회나 경제, 환경처럼 서로의 관계에 의해 어떤 현상이 나타나지만 그들 중 어느 한 요소가 변화하면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치게 되기 때문이다. 환경문제나 생태계의 문제가 이러한 예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과도한 연료 사용이 오존층을 파괴하고 그것이 결국은 기상이변으로 연결되어 지구의 곳곳에 많은 재해를 일으키고 있는 경우가 그것이다. 또 생태계에서 어느 한 종류가 멸종하거나 증가하면 다른 것들에도 영향을 미쳐 함께 감소하거나 증가하는 현상들이 시차를 둔 공간적 의존 관계의 연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간적 의존 관계의 연기를 우리의 신체에 적용해볼 수도 있다. 즉 우리의 몸은 신체의 각 부분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움직이고 있다. 우리의 몸은 뼈대와 살과 핏줄, 신경 등이 얽혀 있고 무엇보다도 이를 총괄하고 통제하는 의식이라는 것이 있어서 몸을 움직인다. 만약 이러한 요소의 어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리의 몸은 몸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또한 여기에 음식물이 공급되어 끊임없이 활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한다. 이처럼 신체의 각 요소가 서로 의지해 활동하고 변화해가며 여기에 외부의 요소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을 공간적 의존 관계의 연기라고 한다. 우리가 노쇠하고 죽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의존 관계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존 관계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서로 의지해 있음을 명확하게 나타내주는 것으로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공간적 관계를 횡적인 연기라고도 표현한다. 이러한 공간적 연기, 횡적인 관계의 연기는 스스로 생겨나서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적 연기의 상태에서는 상호 의존하고 있는 요소 가운데에서 무엇인가가 조금이라도 변화하면 그 영향은 끝없이 확대되어 퍼져나가게 된다. 부주의한 하나의 실수가 개인의 생을 파멸함은 물론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할 수도 있는 사태로까지 치닫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 각자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의지하는 관계성 위에서만 삶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남을 위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를 위하는 것이 된다. 불교에서의 무한한 자비의 정신은 한갓 감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연기의 이법에 대한 철저한 자각에서 나온 당연한 귀결이다. 내가 더 나은 위치에서 나보다 못한 것에 대한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서로 의지해 존재하는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무연대자, 동체대비(無緣大慈, 同體大悲)의 사상이 나왔다. 나와 직접적인 인연이 없는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무한한 자비심을 베풀고 주위의 모든 인간과 자연에 대해서도 내 몸처럼 아끼고 보호하라는 것이 ‘무연대자, 동체대비’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라는 큰 어울림 속에서 서로를 아끼고 보호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자신이 행복해지려면 ‘무연대자, 동체대비’를 실천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눈앞만 보고 이기적인 행위를 했을 때에 그 피해가 돌고 돌아서 결국은 자기에게 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인간은 아귀다툼 속에서 불행만을 겪게 된다. 큰 어울림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지 않으면 모두가 괴로움 속에서 허망하게 쓰러진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고 불교의 기본 사상이다. 



화령 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불교총지종 정사이면서 보디미트라 ILBF(국제재가불교포럼)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 『불교 교양으로 읽다』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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