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일과 목숨 값 | 캠페인 “육식을 줄이자”


먹는 일과 목숨 값


안희경 

재미 저널리스트



이 글은 2012년부터 코로나19가 발생한 2020년까지 8년간의 채식 생활에 대한 고백입니다. 꽤 성실하게 고기를 멀리해왔지만, 코로나19 속에서 이동을 제한하는 록다운 시절, 그 원칙을 내려놨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장 보길 권장하는 방역 지침 속에서 신선한 채소를 다양하게 구하기 어려웠고, 면역력을 강화하지 않으면 위태로워질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은근슬쩍 나와 세상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했던 다짐을 풀은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며 다시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덕분에 제 건강을 위한 식생활 검토까지 다시 할 수 있는 감사한 기회를 얻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이 ‘나의 건강’, ‘세상의 건강’을 함께 돌보며 나아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씁니다.


2012년 봄에 소, 돼지, 닭, 칠면조를 먹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동물 복지 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한 세계적인 윤리학자 피터 싱어 프린스턴대학교 교수와 인터뷰를 하고 난 다음이었다. 그의 말 가운데 내 속에 2009년부터 자리해온 채식을 해야 하지 않을까 머뭇거렸던 생각을 행동으로 자극한 지점이 있었다. 그는 특히 “붉은 고기를 먹으면 순환계에 좋지 않다”라는 말을 했다. 물론 육식을 자주 하는 현대인의 식생활이 지구에 무리를 주는 점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소화기가 약한 내 몸에 채식이 좋다는 생각이 들자 벼락치듯 생활을 바꾼 것이다. 마음은 좋은 것을 좇고, 싫은 것을 피하려 한다. 다행히 내게 좋은 것이 다른 생명체에도 이득을 주는 선택이라고 여겨 안도했다.
고기 먹기를 멈추기까지 어려운 점은 별로 없었다. 고기를 먹겠다는 생각을 끊으니 고기 냄새가 때론 역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여름부터는 유제품까지 멀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유는 두유로 대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치즈와의 이별은 쉽지 않았다. 애써 참았다. 그리움까지 단속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2002년부터 한국을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다. 치즈는 내게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는 특효가 있었다. 웬만한 한국 음식을 얼추 흉내 내 맛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온갖 식자재가 풍부한 캘리포니아지만, 삭힌 홍어만큼은 구할 수가 없다. 문뜩문뜩 생각나는 홍어 맛은 당장이라도 한국 가는 비행기표를 끊고 싶게 만든다. 물론 비싼 비행기표 값이 충동을 진정시키지만 그럴수록 그리움은 진해졌다. 어느 날이었다. 마트에서 꽤 오래 숙성된 프랑스산 치즈를 구입했다. 비닐을 벗기자 쿰쿰한 냄새가 났다. 어릴 적 봄날 마당에 묻은 김장독을 비울 때 나던 냄새였다. 입에 넣자, 코끝으로 미미하게나마 찌릿함이 전해졌다. 그랬다.
그렇게 그리움과 하나 된 치즈를 생각에서 몰아내는 일은 고약했다.
유제품을 멀리한 이유는 단순했다. 아이 둘을 젖을 물려 키웠기 때문이다. 잉태하고 출산하는 과정보다 젖을 짜내는 처음 몇 주가 가장 고통스러웠다. 그런 고통을 젖소들이라고 겪지 않을 리 없다. 르포와 다큐멘터리에서 마주했던 수많은 젖소들이 유선염과 암으로 퉁퉁 분 젖 때문에 제대로 땅에 발 딛고 서 있지 못했다.같은 포유류 어미로서 연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무엇보다 새끼에게 젖을 물릴 기회조차 빼앗긴 채로 유제품 산업 속에서 생산 부품이 된 어미들의 현실이 아팠다. 그 어미가 낳은 송아지 중 수놈은 무가치한 부품으로 취급되어 도살된다.
육고기를 멀리한 이유도 현대 먹거리 산업에 대한 나의 소극적인 저항이었다.
한 명의 소비자로서라도 공장식 축사에 반대하고자 했다. A4 용지만 한 공간에서 도축될 때까지 살아야 하는 닭들, 태어나 죽는 한평생이 6개월이 되어버린 현대의 돼지들. 흙에 코를 묻고 땅을 파는 돼지의 본성도 공장식 축사에서는 애당 초 누릴 길조차 막혀버렸다. 분뇨 청소가 용이한 쇠 바닥 위에서 몸뚱이를 키우며 6개월짜리 천수(天壽)를 견디다 죽음에 이른다.
또 하나, UN식량농업기구는 저 너른 들판의 곡식이 모두 인간에게 돌아간다면 지구 인구가 두 배 가까이 늘어도 다 먹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도 인구의 10%가 기아선상에 있다. 들판의 곡식과 아마존을 불태워 키워낸 곡식의 상당수가 축산업으로 가는 것도 한 이유다. 점점 더 엄청난 곡식이 손바닥만 한 스테이크가 되어 육즙을 머금고 인간의 입으로 가는 구조로 흘러가고 있다. 나는 40년 가까이 고기도 유제품도 실컷 먹었다는 생각이 들어 비정한 ‘먹방 문화’에 대해 사사롭지만 반기를 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 고기를 살 때면 가능한 동물 복지를 보장해 키운 제품으로 구매하기 시작했다.
1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문득 속이 편안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20・30대에 종종 신물이 올라오곤 했는데, 그런 일이 없어졌다. 무릎에 부담을 주던 체중도 줄었다. 고기를 끊고 오히려 내가 먼저 덕을 보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 속에는 나의 허영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좋은 일을 했기에 덕을 본다’는 식의 섣부른 자만감 말이다. 남들보다 살생을 덜한다는 자아도취도 끼어 있다. 과연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살생을 덜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을 2010년에 찾은 그린 걸치(Green Gulch)에서 얻은 바 있지만, 역시나 아는 것과 마음의 습관, 그러니까 일상을 채우는 인이 박힌 생각과 말과 행동까지 바꿔내는 데까지는 참으로 멀고도 멀다는 것을 매번 확인한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인근에는 농사짓고 수행하는 그린 걸치라는 선원이 있다. 이곳은 북부 캘리포니아 유기농 운동의 성지로 불리기도 한다. 산을 휘도는 너른 도량 가득 온갖 녹색 채소와 과일나무, 꽃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그곳을 찾았을 때, 관리자인 새라 터커가 농원 한쪽에 모종을 키우는 비닐하우스로 안내했다. 선반 위 모종판 안에서 상추 씨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선반 둘레에 둘러놓은 끈끈이 테이프가 나를 기겁하게 했다. 깨알같이 작은 벌레들이 들러붙어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채식을 하면 살생을 하지 않겠거니 생각해왔던 것 같다. 그때까지 생명망의 본질을 모르고 ‘살생’이라는 글자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생명을 키우는 농사도 짓는 그 순간부터 수없이 많은 생명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자연은 그랬다. 결국 우리가 살아 숨 쉬는 그 과정이 다른 생명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새라에게 당황한 나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10년 넘게 농사지으며 참선해온 수행자답게 새라가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음챙김을 해야겠지.”
나는 새라의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내가 살기 위해 먹는다 해도 나를 살리기 위해 스러지는 수많은 생명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 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행할 것 인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일 것이다. 마음을 깨워 의식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다. ‘목숨 값’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깊이 새겨진 순간이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먹어야 할까? 2009년에 틱낫한 스님의 책 『우리가 머무는 세상』을 번역하며 뇌리에 새겨진 단락이 있다. 부처님께서 수도승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한 부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사막을 건너고 있었다. 그 가족은 아무도 모르는 먼 곳에서 새 삶을 살고자 피난을 떠나는 길이었다. 무작정 몸을 피하고자 떠났기 때문에 그들의 보따리는 허술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사막을 채 반도 건너지 못했을 때, 음식이 동이 났다. 세 식구가 모두 사막에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뻔한 이치였다. 부모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결국 아이의 부모는 소름 끼치는 결정을 내렸다. 아들을 죽이고 아들의 살점을 먹기로 한 것이다. 매일 아침 이 부부는 아들의 살을 아주 조금만 뜯어 입에 넣었다. 겨우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있는 기운을 차릴 만큼만 먹었다. 식사하는 동안 그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들아, 우리 어린 아가야, 어디에 있니?”
식사가 끝나면 부부는 아들의 남은 살덩어리를 메고 걸어 나갔다. 어린 아들의 살은 아비의 어깨 위에서 태양을 받아 말라가며 저장 가능한 음식으로 굳어갔다. 밤이면 두 부부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물었다.
“여보,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는 지금쯤 어디 있을까요?”
그러고는 소리 내어 울었다.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회한으로 가슴을 쳐댔다. 그들은 마침내 사막을 가로질러 건널 수 있었다. 그래도 그 둘만은 새 땅에 도달할 수 있었다.
부처님은 이야기를 마치고 제자들에게 물었다.
“자네들은 그 부부가 아들의 살코기를 즐기며 먹었다고 생각하는가?”
수도승들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들의 몸을 입에 넣어야만 했을 때, 부모들은 지독히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부처님이 말했다.
“우리는 그와 같이 먹어야 한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음식을 대하고 먹는 수행을 해야만 한다. 그 마음가짐은 우리의 가슴속에 자비심을 붙들어 매둘 것이다. 우리는 온 마음을 깨워 살피며 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우리들 자식의 살점을 먹게 될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우리 모두가 미래를 온전하게 누릴 수 있도록 마음을 차리고 소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우리가 아들의 살점에 담긴 가르침을 매일 생활에 적용한다면 우리는 매일 지구를 구하는 셈이라고 했다. 인간이 위기를 벗고 살 수 있는 내일을 연장하는 것이다.

요즘 우리는 지구의 환경이 임계점에 도달한 듯한 징후를 온몸으로 감지하고 있다. 홍수, 태풍, 가뭄, 산불, 더위와 추위까지 사철 내내 불과 몇 십 년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기후변화를 느낀다. 안타깝게도 그 속에서 약자의 일상이 먼저 무너지고 있다. 그 순서가 점점 더 안정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로 가까워진다. 바닷가에서 즐겨 하던 모래탑 허물기 놀이 속에 모두 갇힌 형국이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온 마음을 모아 떠올리고 실행해야 할 때이지 않을까 싶다. 미래는 현재가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기에 우리의 오늘 속에 내일의 안녕이 달려 있음을 기억해야겠다. 마음을 챙겨 살아가는 일, 무엇을 먹고 무엇을 행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자 답이라 여긴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안희경 재미 저널리스트. 2002년 미국으로 이주, 문명사적 성찰과 대안 모색 등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세계 지성들과 코로나19의 원인과 이후 인류의 미래를 탐색하는 『오늘부터의 세계』, 세계적 마음 전문가들의 인터뷰집 『사피엔스의 마음』, 리베카 솔닛 등 세계 여성 지성들과의 대화를 엮은 『어크로스 페미니즘』 등을 펴냈고, 에세이 『나의 질문』과 최근작으로 세계적 석학들과 인류 문명 10년 생존 전략을 논하는 『내일의 세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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